마지막 날입니다.
이제 모든 촬영을 마치고 내일 돌아갑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극심한 피로가 찾아옵니다.
오늘은 잭슨 할아버지와 인터뷰 촬영으로 시작했습니다.
고르고 고른 이쁜 골목을 배경으로
4-5가지 질문을 하고, 그걸 프로그램 중간중간 끼워 넣는 용도입니다.
잭슨 할아버지는 참 말씀을 잘하십니다.
'당신에게 골목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골목은 직선이 아니고 곡선입니다.
삶에서 희가 있다면 비가 있고
달이 차는 때가 있다면 저무는 때가 있다는 걸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리고 골목길에서 모퉁이를 돌 때
느닷없는 풍경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우리 삶에도 지금의 힘든 고비에서
모퉁이를 돌면 전혀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골목을 삶에 대한 비유로 해석하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번 촬영을 통해 만난 많은 사람들 중 누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손자가 태어난 기념으로 나무를 심은
그 버드나무가 있는 가겟집 아저씨를 말합니다.
앞선 글에서 저도 그 아저씨가 참 인상적이었다
아저씨는 나무를 볼 때마다 아들을 떠올릴 거라고 말했는데
잭슨의 표현은 더 멋집니다.
아저씨는 나무를 볼때마다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을 둘 다 떠올릴 거라고.
과연...
그리고 군산에서 만난 많은 이들이 외로워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잭슨 할아버지도 외로운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처음에 어색하고 다소 당황하기도 했지만
결국 저는 이번 여행을 통해
잭슨 할아버지라는 너무도 특이한
한 사람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촬영 중 시간이 날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이나마 교감하고 알게 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젊은 시절 한국에 와서
사물놀이, 검도, 태권도를 배우고
조선대학교에서 영어도 가르치고
미국에선 용접일도 했었고
연세대 동아시아학 대학원도 다녔고
설암으로 생활을 완전히 바꾸고
치유를 위해 하와이에서 서핑을 했었고
현재 제주도와 구례를 오가며 살고
결혼은 하지 않았고
한국의 양로원에 가기 싫어
미국의 어머니의 집을 고쳐서 거기서 말년을 보내기 위해
돈을 모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고
주석과 성리학을 좋아하는......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 어려운 상황과 나이 차이지만
분명 잊혀지지 않을 강렬한 존재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책을 쓴다고 했고
나는 꼭, 기꺼이 그 독자가 되고 싶습니다....
5박 6일의 촬영으로
군산의 이곳저곳을 다리 아프게 허리 아프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담았지만
제가 군산에 대해, 군산의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알겠습니까....
이 일정을 통해 제가 그나마 알게 된 건
결국 잭슨 할아버지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인터뷰를 하고, 남은 보충 촬영을 마치고
할아버지에게서 마이크를 제거합니다.
이제 진짜 '해방'인 거죠.
공항까지 배웅을 하고 사진을 같이 찍습니다.
우리는 포옹을 하지도 않고
행여나 눈물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처음 만날 때처럼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헤어지지만
분명한 건
오래 기억날 강렬한 분이라는 것..
숙소에서 쉬고
밤에 다시 나와
유튜브를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해봅니다.
'나이트 워크'
낮에 촬영한 장소들을 밤에 가보는
로닌(짐벌)을 활용한 부가 콘텐츠입니다.
밤의 군산은
이제 마지막이라 그런지
추석을 앞두고 있어 그런지
잭슨 할아버지와 헤어져서 그런지
낭만적이고 고즈넉하고
바람이 선선합니다.
그러곤 숙소로 들어와
카메라 감독이 추천한
군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를 봅니다.
정말 우리가 갔던 해성 식당, 빈해원
등등 군산의 이곳저곳이 다 나오네요
하지만 절반만 보고 (왠지 신파로 흐를 것 같아서)
이 글을 씁니다.
기분이 묘하네요
포비든 앨리 제일 첫 촬영지인
영국 편을 마치고
프랑스 편을 마치고
작년에 목포와 광주 편을 마쳤을 때와 비교하면
들뜨지도 않고, 술을 많이 먹지도 않고,
격한 감정이 들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왠지 오래갈 묵직한
느낌이 듭니다.
제가 잭슨 할아버지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왠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특별해집니다.
할아버지가 말했던 개념어들
synchronicity
paradolia
synesthesia
어렴풋하게 알듯 말듯한 그 단어들을 공부해야겠습니다.
주역을 공부할 생각도 듭니다.
할아버지가 했던 모든 대사들의 번역본이 나오면
천천히 모두 다 읽어봐야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포비든 앨리 군산 편을 아마 주의 깊게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요?
참.
이날 점심은 장미 칼국수에서 먹었습니다
저는 굉장히 맛있었습니다. 다시 가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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