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해협>은 2020년 방영한 다큐멘터리입니다.
회사 사정으로 여러 차례 유튜브에서 내리고 다시 올리고 하느라
조회수가 많이 줄었지만, 유튜브에서 현재 27만 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비운의 프로그램입니다. 원래 한일 교류사를 망라해보려 했던 야심 찬 기획인데
제작 중에 한일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본래 기획의도와 전혀 다른 작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화위복으로 삼으려고 갖은 애를 썼던 건 사실입니다.
도자기, 다도 등등 열심히 찍고도 방송에 나가지 못한 장면이 많습니다.
기회가 되면 영상으로든 글로든 되살려보고 싶습니다.
아래 글은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가기 전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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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비든 앨리>는 프로그램 콘셉트가 세계의 골목인지라, 정말 골목을 온종일 걸었더니 허리가 너무 아팠습니다.
오죽하면 생전 처음 가 본 파리의 샹젤리제에서 제일 처음 한 일은 우습게도 약국 방문이었습니다..
복대 하나, 진통제 한 통.... 그 뒤로도 1010여 일을 진통제 투혼을 발휘했었습니다.
(마르세유에서는 식중독까지 겹쳐서 제 인생 최악의 해외 촬영이었습니다))
암튼 ‘이제 나는 해외 촬영이 불가능한 것인가?’라는 자괴감이 들만큼 허리가 아파서
큰 용기를 내어 한방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입원은 1995년에 이래로 처음으로, 무려 25년만이네요...
딱딱한 병상에 누워 ‘집단 소등’을 하고 철제 식판으로 삼시 세 끼를 먹는 생활을 하면서
‘일제 징용자’ 관련 책들을 읽노라니 너무너무 감정이입이 잘 되고 있습니다.
왜 그런 책을 읽는가 하면,, 제 다음 아이템이 <한일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아! 시류에 영합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한일관계가 나빠지기 전에 이미 작년부터 계획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미 무수한 언론들이 징용 관련 아이템을 참 많이도- 완벽에 가깝게- 해냈더군요...
어떻게 하면 새로운 이야기를, 아니면 같은 이야기더라도 색다르게 선보일지 고민하느라 무작정 읽고 있습니다.
“아버지랑 둘이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면서기가 무슨 서류를 들고 왔다.
아버지는 때 이른 밥을 먹자며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정작 밥은 먹지 않고 바로 짐을 싸신다.
기차역으로 가면서 아버지는 한마디도 말이 없다.
자식을 생사를 담보할 수 없는 곳으로 보내며
어쩌면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아버지는 말이 없다.
하지만 자식에게 정이 없는 무뚝뚝한 아버지가 아니다.
아버지가 주신 보따리에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반지가 쌀 속에 숨겨져 있다.
이 반지는 아들이 일하게 된 탄광 관리자의 검열에 걸리고
그로 인해 아들은 고초를 겪는다.
아버지의 사랑이 오히려 화가 된 것인가? 아니다.
이 고초 덕분에 아들은 탄광에서 탈출하게 되고.... “.... “
(딸이 전하는 아버지의 역사/ 이흥섭 저)
이런 이야기들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묘하게도 바로 전 작품인 <설탕의 제국>이 떠올랐습니다.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이 노예상인들에게 붙잡혀서
노예선에 실려 바다를 건너는 모습과 그대로 오버랩됩니다..
징용자들은 부산항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로 갔습니다.
배를 처음 타는 이들이 다수. 이들은 밤새 배 멀미에 시달렸습니다.
또 다른 책에는 이렇게 일본으로 넘어온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네 자매가 온갖 고초와 풍상을 겪으면서도
서로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눈물이 주룩주룩>이라는 노래(마마무 솔라의 리바이벌곡)를 알게 되어
함께 들으니 더욱 눈물이 나왔습니다.
일본 노래가 원곡이라는데, 찾아보니 돌아가신 오빠를 추억하며 쓴 곡이라고 합니다.
작곡가가 오키나와 사람이기에 일본 원곡에는 오키나와 전통 기타인 사미센의 소리가 무척이나 감미롭습니다. (2019.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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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을 쓴 직후 오키나와로 촬영을 갔습니다.
오키나와는 <만국유람기>를 제작할 때 20여 일간 있었던 곳이라 아주 특별한 기억이 있습니다.
<대한해협>에서도 오키나와 사례를 가장 깊이 있게 취재했기에 더 특별한 기억들이 더해졌습니다.
이에 대해 따로 언급할 계획입니다.
앞서 말한 것 처럼 <대한해협>은 본래 한일 문명교류에 대한 기획이었습니다.
그러다 첫 번째 촬영 중에 “화이트리스트” 사건이 터지고,
일본 제품 불매운동까지 벌어졌고
도저히 원래 기획대로는 방송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제대로 꼬인 것인데요,
왜냐하면 보통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자료조사를 끝내고 방대한 기획안을 작성하거든요.
더욱이 촬영을 가려면 미리 섭외를 다 해놓고 가게 됩니다.
그러니 저는 첫 번째 촬영은 원래 기획대로 찍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심혈을 기울인 아주 많은 아이템들....
예컨대, 도자기, 다도, 음식을 통해 본 한일 교류사에 관한 아이템들을 다 찍어놓고
방송에 하나도 내보낼 수 없게 된 것이죠. 물론 기획안도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고요..
그 결과, 다소간의 식상함을 알면서도 '징용' 문제를 원래 기획안보다 훨씬 양을 늘려서
1부 전체로 다뤄야 했습니다.
1부가 식상함을 의식한 것인지 2부는 과감한? 무리수를 던지게 되는데요
당시 언론지형에서는 ‘일본 국가’와 '일본 시민’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까지 논의가 나아갔고
아베, 그 너머 '일본회의'가 존재한다는 것까지 밝혀냈습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일본의 ‘민주주의’ 자체를 들여다보려 했습니다..
내가 무슨 저명한 정치학자도 아닌데 감히 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는가....?
당연히 움츠러들 때도 있었지만 선배들의 격려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선배’들은 pd선배들도 있지만, 졸업 이후 실로 오랜만에 연락한 대학 선배들도 있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괴롭혀드린 그분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제가 아는 한에서는 가장 신뢰하는 선배에게
일본의 민주주의를 들여다보는 이 기획이 유의미한가..라고 질의했을 때
유의미하다는 답을 들은 것이죠.
주어진 시간과 예산 제약 하에서
나름대로 일본의 학계, 정계, 언론계, 시민사회, 천황제, 정당구조 등 다양한 각도에서
일본의 민주주의를 들여다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신기한 것은 유튜브 조회수는 항상 2부가 1부보다 더 잘 나옵니다.
회사 사정으로 여러 번 올렸다가 내렸다가 다시 올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항상 그랬습니다.
어렵고 딱딱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는데도
정말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셔서 기분 좋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일관계는 정말 뜨겁고 예민해서... 참 어렵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도 얼마나 많은 허점과 비판, 혹은 다른 생각들이 있을지 가늠이 안 됩니다.
하지만 저는 늘 이렇게 생각합니다.
밤새워 감상에 젖어들어 휘갈겨 쓴 편지.
아침이 되어 다시 읽어보면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저는 어느 쪽이냐 하면,,
용감히 보내는 편입니다. 결코 찢어버리지 않습니다.
격려해주신 선배의 말처럼
이 주제로 일관되게 나아간 것.
보다 거시적 시각으로 보려 한 것.
그게 작지만 의미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부끄러운 글이지만 이 글을 남기는 것은
아깝게 촬영한 부분들 꼭 되살리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쿠바 (0) | 2021.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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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의 제국 (0) | 2021.0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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