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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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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피디76 2021. 4. 5.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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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되면 언젠가 길게 적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은,

어린 시절 저는 단 한 번도 pd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

돌고 돌아, 돌아 돌아 

pd가 되었고, 

 

가족들도 전혀 예상치 않았던 터라

입사하고 무려 10년 동안은

아버지께서 "적성에 맞냐?"라고 진지하게 계속 물어보셨습니다.

 

지난 시절 나에게 pd의 싹수가 있었나....

돌이켜보면 (혹은 억지로 끼워 맞춰 보면)

그나마 그럴듯하게 연결되는 것이 '만화'입니다.

 

틈나는 대로 만화를 보았고, 꽤나 진지하게 보았고

거의 모든 장르를 (누나들이 있는 터라 순정만화까지)

초등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보아온

말하자면 '만화 우등생'이랄 수 있습니다.

 

그런 저에게 인생 최고의 만화를 딱 한 권 고르라면?

아무래도 저는 기생수를 고를 것 같습니다.

 

평소 징그러운 그림들을 싫어함에도 이 기괴하고 징그러운 그림들이 잔뜩 나오는 만화가

왜 그토록 명작이라는 생각이 들까요?

 

결코 그림을 잘 그리는 작가가 아닌데

이상하게 보다 보면 그림을 참 잘 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sf로 분류될만한 설정이지만 결코 '이상한 곳'으로 안내하지 않습니다.

가장 가슴에 남는 것은 오히려 '어머니'...  (스포일러라... 보신 분은 이해하실 듯)

 

그리고 이 작가는 결코 선을 넘지 않습니다. 무수한 작가들이 멋진 인트로로

환상적인 전개를 보이다가 결말에서 좌절하고 맙니다.

하지만 이 작가는 딱 적당한 곳에서 만족할만한 결말을 이끌어냅니다.

 

무엇보다 이 만화를 좋아하는 것은

(개인적인 이유이자 또 보편적 이유이기도 한데)

그 메시지의 깊이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입니다. 

 

아래 글은 2000년에 쓴 만화 평론을 조금 고친 것입니다.

 

환경운동(이라기보다는 그저 나만의 개똥철학)에 푹 빠져있었고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바뀌는 시기였던 만큼 치기 어린 글이긴 합니다만

<기생수>를 마치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최대한 많은 것을 읽어내려 한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

 

몇 년 전만 해도 서점에서 환경에 관한 책들이 드물더니 요즘엔 참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책들의 목차를 보면 선언과 도표, 이론의 나열입니다.

이것은 현재 환경운동의 지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읽고 싶은 책은 전혀 다른 책입니다.

 

천재 과학자와 믿음직한 정부가 지구의 환경문제를 해결하리라 믿지 않는다면,

새로운 '환경교과서'는 바로 나 자신의 삶이 어떻게 지구를 바꿀 수 있는가에 관해 말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디언들의 삶의 방식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또, 자신이 매일같이 물을 주는 식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 식물을 생각했더니

그 식물에 반응이 왔다는 과학실험도 꼭 들어가야겠군요.

무탄트, 텔레파시, 불교의 연기설 등

모든 생명체가 보이지 않는 미세한 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들도 들어가야겠고요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책의 소문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가장 여기에 가까운 책은 바로 만화책 <기생수>입니다.

 

이 작품은 인간 중심의 시각을 지구, 생명 중심으로 교정하는 역할을 충실히 합니다.

<기생수>의 그 유명한 첫 내레이션은 인간 중심주의를 완전히 벗어난 경지를 보여줍니다.

 

독자들은 이 만화를 통해서 다른 생명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 다른 모든 생명을 짓밟고 있는 상황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깨닫게 됩니다. (도대체 기생수가 인간을 죽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뭐죠?)

피와 살 조각으로 범벅된 잔인한 장면들도 오만한 인간 역시 다른 생명들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역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지구 생명 중심으로 보면 사물이 다르게 보입니다. 한 예로, 섹시한 여자를 기생수가 여러 가지 화학물질로 범벅된 먹기 불편한 생명체일 뿐이라며 불평하는 장면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합니다. 흔히들 부러워하는 회장, 사장, 판검사들. 그들이 이 지구에 무슨 도움이 되는 거죠? 더 큰 영향력이 있는 만큼 더 많이 더럽힐 위험이 있으니 평균을 내면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의사는 물론 소중한 직업입니다.  또한 가장 중요한 직업은 농부입니다. 아니 이런 관점에서는 무엇이 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구의 관점에서는 덜 더럽히는 사람, 생명을 가꾸는 사람, 주위 사람들에게 활'기'를 주어 지구의 분위'기'를 좋게 하는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게다가 <기생수>는 시장의 연설을 통해 실천적 지침을 내려주기까지 합니다.

(제겐 그 한마디 한마디가 감동이었습니다)

자치구를 '접수'해서 가장 작은 단위에서부터, 일상에 근거하여 변화를 이루어낸다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가장 타당하고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환경운동이란, 관점을 바꾸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의 삶과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실천의 측면에서는 가장 작고 구체적인 부분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할 수 있지만 안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차를 탈 수 있으면서도 걷고, 보일러를 틀 수 있으면서도 내복을 입고.... 지난 세기 인류의 역사가 자연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 세기는 자연의 제약을 벗어나 얼마든지 자연을 파괴하고 보복할 수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배려와 연대'를 배우는 세기가 아닐까요? 그것이 신적인 존재가 '선'만이 존재하게 할 수 있으면서도 '악'을 만들어 인간을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한 의도와 다르지 않다면 지나친 생각입니까?

 

(2000년 1월 월간 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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